보험사 지점장 근로자성, ‘정규직과의 동일성’으로 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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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에서 같은 날 보험사 지점장들의 운명이 갈렸다. 한화생명보험과 농협생명보험 지점장은 근로자로 인정됐고 오렌지라이프생명보험(신한라이프생명보험)과 흥국화재생명보험 지점장은 개인사업자로 남게 됐다. 대법원이 보험사 지점장의 근로자성을 판단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선고가 같은 날 있었던 만큼 4개사 지점장들이 운명을 같이 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면서 관심이 쏠렸지만 예상과 달리 각기 다른 판단이 나왔다.
판결이 엇갈린 배경으로는 일반직 지점장(정규직 지점장)이 지목된다. 근로자성이 인정된 사건에서는 일반직 지점장과 위탁형 지점장(사업가형 지점장)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점이 판단 근거로 제시됐다. 반면 근로자성이 인정되지 않은 보험사에는 일반직 지점장이 없고 위탁형 지점장만 있었다.
'일반직과 동일성'에 갈린 판결...근로자성 인정 근거는?
20일 <노동법률> 취재를 종합하면 대법원이 오렌지라이프ㆍ한화생명ㆍ흥국화재ㆍ농협생명 지점장의 근로자성에 관한 첫 판결을 내놨다. 오렌지라이프와 흥국화재는 퇴직금 청구 소송, 한화생명은 부당해고 구제 재심판정 취소 소송, 농협생명보험은 해고 무효 확인 소송이다.
소송을 제기한 지점장들은 모두 위탁형 지점장이다. 보험사 지점장들은 크게 두 가지 형태로 나뉜다. 보험사에 고용된 일반직 지점장과 위탁계약을 맺고 일하는 위탁형 지점장이다. 위탁직 지점장들은 계약 내용상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니지만 일반직 지점장과 유사한 업무를 수행하고 있어 근로자성이 분쟁이 이어지고 있다.
대법원은 한화생명과 농협생명 사건에서 지점장 측 손을 들어줬다. 이들이 사실상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고 계약 해지가 부당해고라고 판단한 것이다.
소송을 제기한 한화생명 지점장 A 씨는 보험설계사로 일하다 위탁형 지점장으로 전환됐다. 회사가 계약을 해지하려하자 A 씨는 부당해고에 해당한다면서 노동위원회에 구제 신청을 제기했다.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A 씨를 근로자로 봤지만 중앙노동위원회와 1심, 2심 법원은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회사가 업무 내용을 일방적으로 결정하거나 업무상 지휘ㆍ감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A 씨가 회사에 목표와 실적을 보고했던 건 위탁계약상 업무에 불과하고 회사로부터 일방적인 인사발령이 이뤄지지도 않았다는 판단이다.
농협생명에서도 유사했다. 농협생명의 경우 1심에서 원고 측이 패소했지만 2심에서는 근로자성을 인정받았고 대법원도 같은 판단을 내놨다.
1심은 소송을 제기한 B 씨의 업무가 독자적인 영업 비결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율적인 방식에 따라 수행됐기 때문에 회사의 지휘ㆍ감독을 받지 않았다고 봤다. 회사가 배포한 업무 매뉴얼도 가이드라인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반면 2심은 위탁형 지점장의 업무와 일반직 지점장의 업무가 재량권에서 차이가 없다면서 하급심을 뒤집었다. 2심에서는 B 씨가 회사로부터 매달 500만 원 수입을 보장받은 게 성과급 형태인 임금으로 인정돼 근로자성을 뒷받침했다.
대법원은 이 두 사건에서 일반직 지점장과의 동일성에 집중했다. 한화생명 사건에서 대법원은 A 씨와 일반직 지점장이 같은 방식으로 관리ㆍ감독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지점장들을 관리하는 지역단장은 위탁형 지점장에게도 동일하게 시기별로 구체적인 실적 목표를 제시했다. 위탁형 지점장들은 정규직의 인사규정, 근무시간 규정을 적용받지는 않았지만 실제 근무형태에는 차이가 없었다는 점도 덧붙였다.
농협생명 사건에서도 대법원은 일반직 지점장과 위탁형 지점장의 동일성을 인정한 원심 판단을 그대로 유지했다.
근로자성 부정된 오렌지ㆍ흥국...위탁직 전환 절차 있었다
그러나 근로자성이 부정된 오렌지라이프와 흥국화재에는 일반직 지점장이 존재하지 않았다.
흥국화재는 2006년부터 지점 내 영업소를 모두 지점으로 승격하면서 정규직 지점장들을 위임직 지점장으로 전환했다. 이 과정에서 흥국화재는 지점장들을 대상으로 설명회를 진행하고 위탁형 지점장으로 전환을 희망하는 지점장들에게 사직서를 받아 새로운 계약을 체결했다.
그 결과 1심과 2심은 이들이 근로자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대법원도 원심을 유지했다. 지점장들이 스스로 위탁형 지점장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지점장들이 흥국화재로부터 제공받은 사무실과 집기를 이용했고 회사로부터 지휘ㆍ감독을 받았다는 등 지점장 측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흥국화재의 경우 지점장을 징계할 때도 위탁형 지점장이 근로자가 아니라는 것을 고려하는 등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대리점 수수료를 사적으로 사용한 지점장을 징계하기 전 법무법인에 자문을 구했고 자문에 따라 징계 대신 위약금을 증액한 사례가 있다.
오렌지라이프는 흥국화재와 마찬가지로 1999년경부터 2001년 사이에 정규직 직원이던 지점장을 위탁형 지점장으로 변경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점장 중 일부도 보험설계사나 매니저로 일하다 이 시기에 지점장으로 전환됐다.
오렌지라이프 사건도 흥국화재와 마찬가지로 1심과 2심, 대법원의 선고 결과가 모두 같았다. 1심 법원은 지점장들이 자율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업무를 수행했다면서 근로자성을 부정했다.
회사가 업무 계획이나 실적 목표를 제시하고 독려했지만 위임계약의 성질에 불과할 뿐 상당한 지휘ㆍ감독은 아니라고 봤다. 회사가 주재하는 회의에 참석하고 교육을 받았지만 법원은 금융당국의 감독을 받는 업무 특성상 필요한 관리였다고 선을 그었다.
오렌지라이프 지점장들은 본부장이나 중간관리자를 통해 회사의 지휘ㆍ감독을 받았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중간관리자들은 회사가 지점장에게 업무를 위임하고 수행 결과를 취합하는 역할을 했을 뿐 지휘ㆍ감독을 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설명이다.
오렌지라이프 사건에서는 회사가 실적을 관리하고 실적이 저조한 지점장을 전보하거나 해촉하는 방식으로 통제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법원은 "근태와는 무관하게 노무 제공의 결과 자체만을 염두에 둔 조치"라며 "이는 계약해지 등 통상의 위임계약에서도 활용 가능한 계약상대방에 대한 간접적 통제수단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법원이 명시적으로 정규직 지점장과 위임직 지점장과의 동일성이 근로자성 판단 기준이라고 판시한 건 아니다.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한화생명과 농협생명 사건에서 제시된 판단 근거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정규직과 위임직 지점장이 혼재된 보험사와 그렇지 않은 보험사의 선고 결과가 갈리게 됐다. 특히 원심과 결과가 달랐던 한화생명 대법원 판결에서는 정규직과의 동일성이 주요 근거가 됐다. 정규직과의 동일성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던 하급심과는 다른 결과다.
한 대형 로펌 변호사는 한화생명 사건을 두고 "하급심과 비교해서 대법원이 법리를 다르게 적용한 게 아니라 동일한 사실관계를 다르게 판단했다"며 "지점을 관리하는 지역단이 근로자인 지점장과 위탁형 지점장을 결국 똑같이 관리했다고 본 게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흥국화재를 대리한 홍준호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한화생명 같은 경우는 일반직과 위임직이 혼재돼 있었고 흥국생명은 전에 있던 고용직(일반직) 지점장을 전부 위임직으로 변경하는 절차가 있었어서 재판부가 그 점을 상당히 중요한 요소로 본 것 같다"고 말했다.
오렌지라이프를 대리한 김상민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도 "(회사가)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운영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사업가형 지점장만 있는 곳이 아닌 경우에는 근로자성이 있다고 본 것 같다"고 했다.
엇갈린 결과에 남은 아쉬움..."유사한 분쟁 계속될 것"
아쉬움도 남는다. 보험사 지점장의 근로자성에 관한 대법원 선고는 이번이 처음이지만 기존 근로자성에 관한 법리를 적용했을 뿐 별다른 판단을 내놓지 않아서다.
한화생명 지점장 측을 대리한 허원록 법무법인 규원 변호사는 "대법원에서 하급심보다는 좀 더 우호적으로 판단을 했다고 생각한다"며 "당사자가 열심히 회사를 위해서 근무했기 때문에 당연한 판결이었다고 생각하고 사용자 측에서 조속한 시일 내에 원상회복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근로자성을 부정한 흥국생명과 오렌지라이프 사건에서도 대법원의 설명은 길지 않았다. 원심이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는 것 외에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대법원 판결만을 손꼽아 기다린 지점장 측은 허탈한 심경을 감추지 못했다.
오렌지라이프 사건 당사자인 최 모 씨는 "대법원은 무려 1년 8개월 동안 사건을 검토했지만 1심, 2심에서 다뤄진 쟁점들에 대한 답변은 단 한마디도 없이 원고 주장을 기각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한화생명 지점장과 업무 수행 부분은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증거를 제출했지만 한화생명은 상당한 지휘ㆍ감독을 했다고 보고 오렌지라이프는 어떠한 법리적 의견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 대법원 판결으로 미칠 파장도 주목된다. 하급심에서는 위탁형 지점장들의 근로자성을 다투는 유사한 사건들이 계류돼 있다. 대법원 선고가 나오기 전에는 선고 결과에 따라 하급심에서 계류 중인 사건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지만 대법원 판단이 엇갈리면서 유사한 분쟁이 계속될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린다.
최 씨는 "무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청난 고통과 비용을 감수하고 하급심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소송의 근간이 될 수 있는 법적ㆍ사회적 기준을 요구했지만 이번에도 대법원은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이로 인해 보험사는 지점장에게 영업 실적을 압박하고 부당해촉을 하고 정당한 수수료를 착취하는 관행을 그대로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김상민 변호사는 "회사마다 크게 실상이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일부 보험사에서 지점장의 근로자성이 인정되면서 분쟁이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출처 : 2022년 04월 20일 수요일, 월간노동법률 이지예, 김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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